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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2019

[조합40주년] 한국 의료기기, 유리주사·핀셋 등 소모품 중심 국산화

유리주사·핀셋 등 소모품 중심 국산화 움직임
일제시대, X-ray 보급 활성화…남북의료기·동양의료기 국산 의료기기 제조 효시


첨단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의료기기 제조 산업. 우리나라에서 의료기기 제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현대의학의 전래와 맥을 같이 한다.

외과 수술 등 현대의학이 전해지면서 서양 의료기기들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를 모방한 국산 장비들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

암울했던 일제시대 의료기기 제조산업은 어땠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서양의학 도입에 적극적

조선 후기 고종은 한의학 의료기관을 폐지한다.

당시 대표적인 국립의료기관은 혜민서와 활인서가 있었다.

또 전의감을 축소해 국가 의료정책을 한의학에서 서양의학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와 함께 서양식 병원 설립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 주재 미국 북감리 선교사 매클레이가 제안한 서양식 병원의 설립도 동의하면서 서양병원을 설립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제중원은 대한의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서양의학을 도입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썼다.

조선 정부의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은 이후 1885년 4월 근대적 서양의료를 실시하는 국립병원인 '광혜원'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광혜원(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은 곧 제중원(중생을 구제하는 곳)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9년 동안 알렌, 스크랜튼, 헤론, 하디 등 의료선교사가 이곳에서 진료를 했고 앨러즈, 호튼 같은 여의사들도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1893년 에비슨이 국립병원이던 제중원을 갑오개혁 기간에 국가로부터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미국 갑부인 세브란스에 기부를 받아 세브란스병원을 세웠다.

이후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제중원을 대신할 ‘광제원’도 새로 문을 연다.

광제원은 이후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으로 발전했다.

대한의원은 당대 동아시아 전역에서 손꼽히는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초대형 최신식 병원이었다.

30명 이상의 의료진이 있었고, 치료부, 교육부, 위생부가 진료뿐만 아니라 종두사무, 방역, 위생사무, 빈민 무료 시료 등도 담당했다.

대한의원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는 본격적인 현대 의료가 시작됐고 이에 따라 의료기기에 대한 필요성도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일제 주권 강탈이 일어나면서 ‘대한의원’은 ‘대한’이 빠진 ‘중앙의원’으로 개정됐고, 그해 9월말에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자생적으로 발전하던 우리나라의 서양의학은 일본 중심 체제로 전환되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다양한 X-ray장비의 도입 활용 

당시 일본은 당시 최신 장비인 X-ray를 1911년 12월 중앙의원에 설치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도입된 X-ray 장치는 일반촬영용이 대부분이었다.

1923년에는 치료용 X-ray 장치가, 1929년에는 치료용 X-ray가 도입됐고, 같은 해에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치과진단용 X-ray가 도입돼 사용됐다.

X-ray 사용은 급격히 늘어나 1919년 바리움 중독에 대한 기록이 남기도 했다.

1930년에는 전국에 소규모 병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고, X-ray 보급은 더욱 확대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X-ray 장비는 도립병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923년에 이르면서 개인의원에까지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X-ray 장비는 독일 지멘스사의 100mA, 미국 빅토르(Victor)사의 30mA, 일본 시마쯔(shimadzu)사의 10mA 용량 제품들이었다.

1936년에는 X-ray장치가 보급화되면서 의료기기 도입에 대한 신문광고가 진행된 기록이 있다.




유리주사, 핀셋 국산화 움직임

서양의학이 도입되면서 관련 의료기기 제조산업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당시 우리나라는 의료용 소모품 사용이 크게 늘고 있었다.

당시 소모품 대부분이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있었는데, 가격도 비싸고 보급도 원활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 문제들로 국내에서도 유리주사기나 핀셋 등 비교적 단순한 의료기기에 대한 국산화 움직임이 시작했다.

우리나라 의료기기 제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남북의료기, 동양의료기도 이때 시작됐다.

남북의료기, 동양의료기도 초창기에는 일본 제약회사 판매원으로 일하거나 의료기기 위생용품을 수입해 유통하다가 제조업으로 돌아섰다.

남북의료기 이성호 대표는 "당시 서울과 평양에서 의료기기 판매상들이 소수이지만 활발하게 활동했고, 우리나라는 병원에서 쓰이는 수술대부터 시작해 간단한 의료기기들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 병원에 보급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 동양의료기 유봉호 대표도 "1930년대 무렵에는 병의원에 의료기기를 납품하는 판매상이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소수이지만 활발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핀셋, 주사기, 수술대 등 단순제품은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로 국내 생산이 시작되고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서양 근대 의학 교육 시작

일제 시대에 서양식 병원의 중심은 일본인들이 이주를 시작하면서 본격화 됐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의학에 독일식 표준을 채택했다. 이후 일본 의학은 크게 발전했고 이런 성과를 일본인들은 군대에 활용했다.

1886년 조선 정부의 위생 고문이었던 세와키 도시오가 서울에 한성병원을 차렸고, 주로 상류층을 진료했다.

이후에 일제는 조선 민심을 잡기 위해 자혜의원과 도립의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1909년 청주에 최초의 자혜의원이 들어섰고, 1925년에는 모든 자혜의원이 도립의원으로 개편됐다.

1937년 자료를 보면 전국 도립의원이 41곳에 이르고 있었고, 각 도별로 2곳에서 4곳이었다.

병원이 늘어나면서 의료기기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지만 이 당시에는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의료기기였다.

이후 병의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를 운영할 인력에 대한 수요도 커지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가 세워졌다.

학교에서는 한국인들에게 의학교육을 실시했지만 교수진은 매우 빈약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의전 교사는 초창기에는 시설이 빈약했으나 매년 증축 신축 작업을 진행하면서 의학교육에 필요한 시설을 거의 갖춘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진 출처 : 서울대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