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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2019

[조합40주년] 의학 교육을 통해 다양한 의료기기 전파돼

청진기·현미경·카이모그래프·외과용 수술도구 등





첨단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의료기기 제조산업.

우리나라에서 의료기기 제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현대의학의 전래와 맥을 같이 한다.

외과 수술 등 현대의학이 전해지면서 서양 의료기기들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를 모방한 국산 장비들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

이번에는 해방 이후의 혼란스런시기의 의료기기 제조산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924년 경성제대 예과가 개설되면서 우리나라 한국 학생들이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첫해에는 총 168명 중 한국인은 44명에 불과했지만 이후로 그 수가 꾸준히 늘어 1939년에는 74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고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의학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의학교육과 함께 다양한 서양 의료기기들에 대한 경험도 생기게 됐다.

의대생들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청진기였다.

청진기는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서 질병을 진단하는 기기로 한의학에서 쓰이는 맥진을 현대적으로 더욱 용이하게 한 의료기기였다.

이와 함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접했던 의료기기는 현미경이었다.

1930년대 현미경은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확인하거나, 해부학을 통해 병변을 확인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당시 병원에서는 자이스(ZEISS) 현미경, 라이츠(LEITZ) 현미경 등이 가장 많이 사용됐다.

이외 한국인들에게 접근이 허용된 병리학, 해부학 등 필요한 연구용 의료기기들도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의료기기로는 카이모그래프(Kymograph), 원심분리기(centrifuge), 조직절편기(microtome)등이 있다.

카이모그래프는 심근 수축 등 생리현상을 계측하는 기기로 생리학 또는 병리학 수업에 많이 쓰였다.

원통형의 드럼 위에 숯 검댕을 묻히거나, 흰색 종이를 감은 뒤 먹선을 그리게 하는 식으로 기록하는 장치였다.

이외 원심분리기는 원심력을 이용해 혼합물의 성분을 분리하는 장비였고, 조직 절편기는 병리학적, 해부학적 연구를 위한 현미경으로 조직을 관찰할 수 있도록 얇게 자르는데 쓰인 제품이었다.

진단용 기기에는 액대경, 시력검정용 액자, 안과 진단기 등이 있었다.

액대경은 이비인후과 의사가 머리에 두르고 있는 반사경으로 빛을 반사시켜 어두운 곳을 볼 수 있도록 한 제품이다.

시력검정용 액자는 최근 안경점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시력 측정용 그림이다. 또 안과 진단용 기기는 당시 안과 질환을 살펴볼 수 있도록 고안된 제품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신체적 이상을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체온계 등이 널리 보급돼 있었다.

치료용 기기로는 외과용 수술 도구, 치과용 치료도구, 재활치료기구 등이 사용됐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메스라고 불리는 스칼펠, 시저(가위), 니들홀더, 포셉, 리트렉터 등 수술용 도구들이 사용됐고, 단두대식 편도 절제기도 널리 사용됐다.

산부인과, 정형외과, 치과에서도 치료에 필요한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수입돼 사용되기 시작했다. 근대병원은 치료의 장소만이 아니라 서양 근대 과학을 몸으로 배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직후 우리나라는 의학계에 있어서도 해방과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의료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의료기관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제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의료단체들도 속속 새로 창립되기 시작했다. 해방직후 의사 들은 건국의사회를 조직했고 1947년 조선의학협회(현재 대한의사협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조선치과의학회가, 이듬해 대한간호협회로 설립되는 등 의료단체들이 새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료기기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일제시대 산업 생산물 소비시장으로 전락해 변변한 생산시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약품과 의료기기는 대부분 일본과 미국, 유럽 등으로부터 보급됐고, 국내 의료기기 산업은 유통 중심으로 발전했다. 일부 의료기기 산업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가내수공업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해방기를 맞이하여 미군과 원주물자로 들어오는 의약과 의료기기들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대세를 이루게 됐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유통을 한 기업으로 평양에 ‘평남의료기상사’, ‘신의의료기상사’가 있었고, 서울에는 ‘오쿠마의료기’, ‘이와사와의료기’가 각각 ‘한성의료기’, ‘십자당의료기’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고 있었다.

해방 초기 의약품 및 의료기기에 대한 공급에 문제가 생기자 미군 중심의 위생보건사업이 시행됐고, 이 과정에서 태평양 전쟁에서 쓰고 남은 잉여 의약품과 위생용품, 의료기기 등 서방세계의 원조물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그러나 원조물자의 대량유입은 당시 위생보건에 긍정적인 역할을 가져왔으나 한편으로는 일제시대부터 시작한 유리주사기, 핀셋, 수술대 등 소규모 생산은 크게 위축됐다.

이런 가운데도 국내 의료산업을 일으키고자 하는 시도는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