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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2019

[조합40주년] 80년대 중후반 수출 활성화…그러나 심화되는 무역 역조

한국의료기기산업 기술경쟁보다 가격경쟁 위주 한계 드러내
메디슨 등 첨단 의료기기 개발 기업 속속 등장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진행돼 왔다.

초창기에는 콘돔과 수액세트가 전부였지만 점차 품목을 다양화해 주사기, 콘텍트렌즈, 수술도구 등을 개발하고 이들을 수출하면서 수출액을 꾸준히 늘렸다.

초창기인 60년대 의료기기 수출은 3만여 달러였지만, 80년대 중반에는 1억 달러가 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은 답보상태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유는 최첨단 의료기기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

이후에도 수출액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수입액의 증가는 이보다 더 가파랐다.

이런 가운데 90년대 첨단 의료기기 기업들이 한 둘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의 무역역조 현상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 상승 의료시장 급성장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경제성장으로 인한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와 의료보험의 전국민 확대가 실시됨에 따라 의료시장이 급성장하게 된다.

또 이런 흐름을 읽고 의료시설들이 경쟁적으로 확충되기 시작했다.

의료시설이 늘어남에 따라 전반적인 의료기기의 수요가 증가했고,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의료시설들도 경쟁적으로 첨단 의료기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의료기기 기술력은 이런 갈증을 해소해 주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

국내에서 첨단의료기기는 X-ray와 새로 개발되기 시작한 초음파진단기 등 일부 품목에 불과했고 품질수준도 만족스럽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의사들을 중심으로 외국 의료기기에 대한 선호의식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국내 첨단 의료기기 시장은 자연스럽게 수입 의료기기들이 장악하게 됐다.

무역역조 현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이 주사기, 콘돔, 수액세트 등 저가제품 위주였고, 수입되는 의료기기를 대응할 만한 의료기기들은 아직 개발단계이거나 초기단계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출액을 크게 늘리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첨단 의료기기의 수출 시작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은 1960년대 콘돔, 수액세트, 주사기가 주류였다면 1970년대에는 남북의료기 등에서 일반 의료기기, 치과기자재(신흥), X-ray(동아엑스선기계, 현 리스템) 등에서 첨단의료기기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메디슨이 등장하면서 수출이 본격적으로 이뤄졌지만 아직까지는 제품 초기 단계로 수출량이 증가하긴 했지만 큰 수치는 아니었다.

1980년대를 전후해 2,000만 달러를 넘긴 수출은 1985년까지 미미한 증가세를 이루다가 1986년 4,000만 달러에 육박한 뒤 1987년에는 5,800만 달러, 1988년 9,2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자료가 달라 수출액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1989년에서 1993년까지 이루어진 수출품목의 동향을 살펴보면 의료용품에 비해 의료용구의 수출 증가율이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비중으로 보면 아직도 의료용품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점차 첨단 의료기기를 중심으로 하는 수출품목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총 수출액은 약 3천 7백만달러 증가했는데 그 중 의료용품은 1천만 달러 미만 증가했으나 의료기기는 2천7백만 달러가 늘어나 점차 의료기기가 수출주도품목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의 경우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의료용품이 총 수출액의 62.4%를 차지하고 있
어 수출제품의 구조가 기술경쟁력보다 가격경쟁력에 있었다.


8/16/2019

[조합40주년] 1980년대 의료시장 확대…제조기업 급속한 증가

정부, 의료기기산업 관심 증가…규제 강화·국가지원사업 추진 등


의료기기산업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판매업소의 증가도 두드러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판매업소는 1975년에 1,000개소를 돌파한 후 1980년에는 2,100여 개소로 늘어났다.

이들 판매업소는 통계상 위생용품 판매업소가 포함된 것으로 순수한 의료기기 판매업소는 이보다 훨씬 적은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판매업소의 증가는 의료기기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국내 의료시장의 급속한 확대와 수입 및 생산의 증가를 기반으로 의료기기 판매부문 역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1950년~60년대에 이어 여전히 의료기기산업의 발전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970년대 판매업소 역할은 단지 유통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수입업체와 제조업체에서 직접 운영하는 대리점 등 판매소도 많이 있었지만 판매업소를 운영하면서 직접 수입을 하거나 때로는 제조기업을 설립하는 경우도 많았다.

동서의료기의 박양순 대표도 1968년 서일치과상사를 운영하다가 1976년 동서의료기산업사를 설립하여 치과기자재 생산을 시작했으며 1977년에 종로에서 두산의료기를 운영하기 시작한 김춘중 사장도 1980년대 중반에 철제로 만드는 의료용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로얄메디칼 이규일 회장 역시 전문 수입업체로 출발했다가 80년대 후반부터 마취기 및 관련 부품 등을 생산하는 업체로 성장하는 등 판매업은 유통과 함께 수입과 생산업체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판매업소는 60년대까지 주로 서울에 집중되었으나 그 수가 많아지면서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서울에는 여전히 종로를 중심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으나 병의원의 분포에 따라 판매업소들이 전국 각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판매업소는 점차 취급 품목이 전문화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생산과 수입업체가 운영하거나 전문 유통업체가 생산과 수입을 겸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으며, 각 지역의 병의원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의료수준의 향상과 의료기기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 판매업소는 그 수가 늘면서 1970년대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역별로 협회나 소규모 모임을 통해 상호 부조와 업계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정보 등을 나누는 등 각 지역별로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료기기산업 발전과 제도 변화

의료기기 판매업소가 늘어나면서 의료기기 유통을 관리감독하기 위한 법제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의료기기 산업이 시작된 1954년부터 1970년대까지도 의료기기 산업은 존재가 미미했고 정부에서도 관심 밖이었다.

당시에는 의료기기 관련법도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고 약사법의 일부 조항에 의료기기가 포함되는 정도였다.

초기의 의료기기산업을 관리하는 제도는 약사법에 규정된 기본 시설의 설치와 필요한 경우 해당 기관의 시험검사표를 첨부해야 한다는 등 기본적인 사항에 머물러 있었다.

별도의 관리부서나 관리제도, 관리체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80년대 들어서 의료기기산업이 커지면서 의료산업과 국민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자 의료기기 산업을 관리하는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발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에서 보급, 활용되고 있는 의료용 엑스선 장치의 문제점을 지적한 신문기사로부터 시작했다.

의료용 엑스선 장치의 방사선 안전성 문제는 그 동안 간간이 문제가 돼 왔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인식수준이 높아지면서 1976년 5월 10일에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이 무허가 X-ray양산, 인체에 유해한 방사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국민건강의 문제를 보도하고, 5월 27일에는 동아일보에서도 이 문제점을 기사화하자 X-ray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됐던 것.

대한방사선의학회와 대한방사선사협회 관계자들이 모여 100mA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는 15개 엑스선장치 생산업체를 대상으로 7월28일부터 8월 19일까지 3차에 걸쳐 제조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9월 15일 보건사회부에 엑스선장치의 규격화 및 제조허가 기준의 강화, 국산 제품의 정밀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300mA 이상의 외국 제품 수입금지 해제를 건의했다.

보건사회부는 이에 대해 1978년 10월 18일부터 의료용 엑스선장치 등의 국가검정업무를 시작했으나 정확한 기준이 없어 제조회사의 '자가 기준' 또는 한국공업규격(KS 규격)에 의존해야했다.

또한 전수조사가 아닌 보건사회부의 검사지시에 의한 장치만을 대상으로 검사업무를 수행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이 문제는 1979년 9월과 10월 사이에 주요 일간지들이 불량 엑스선장치의 제조와 판매를 문제 삼으면서 엑스선장치의 관리가 다시 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보건사회부는 1979년 10월 18일 국립보건원과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를 약사법 제66조에 의거해 의료용구검사기관으로 지정하고, 사전검사 대상으로 의료용 엑스선장치를 포함한 22개 품목 40종을 선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는 표준실 이화학기기과를 통해 1980년 1월1일부로 의료용구 검사대상 품목에 대한 사전검사업무를 개시하고, 1월 17일에는 전기부 의료기기실을 신설하여 6명의 인력을 배치했다.

보건사회부는 그해 7월 1일, 이 기관을 보사부고시 제18호에 의해 의료기기 제조시설 조사기관으로 선정하고 기준 및 시험 방법검토 확인업무를 승인했다.

1979년 10월 18일, 보건사회부장관은 약사법의 조항을 근거로 하여 처음으로 국립보건원과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에 내린 의료용구 검사명령을 내렸다.

또 보건사회부는 엑스선장치에 대한 국가기준을 정하기 위해 국립보건원 방사선 표준부 기기과에 지시해 1980년 4월 14일 의료용 엑스선장치에 관한 '시험기준 및 시험방법'을 마련했다.


의료기기산업 최초의 국가 지원사업 

의료기기 산업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관련 제도도 개편됐지만 정부의 관심도 증가했다.

정부는 전자공업진흥 8년 계획을 세우고전자공업을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4억 달러의 수출 실적을 달성하기 위해 총 95개 품목을 개발하도록 지원했다.

이때 의료기기는 청력계, 혈압계, 전자식환자검진기, 거짓말탐지기, 전자원격심전계, 혈구계산기 등 의료기기 6개품목이 포함됐다.

정부에서는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국내 의료기기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1981년 '고가 특수장비 도입 허가 심사규정'을 마련해 고가 수입 의료기기를 일부 통제하기 시작했다.

고가 특수 의료장비를 적정한 시설과 인력을 갖춘 의료기기관에서만 도입해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제해 효율성을 높이고 외화를 절약했던 것.

이는 의료수가 상승요인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도입허가심사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불필요한 수입 의료기기가 무분별하게 도입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80년대 의료기기 국산화 전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한층 확대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건강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졌고, 의료보험제도의 확대 적용 등으로 의료제도가 개선되면서 병의원의 수, 의사들의 수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의료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미 80년대 이전부터 다국적 의료기기업체들이 첨단 의료기기를 앞세워 한국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제조업체들 역시 제조 기술을 통한 생산력 향상과 가격경쟁을 경쟁력으로 외산 기업들과 경쟁을 시작했던 때였다.

8/15/2019

[조합40주년] 80년대 국산 의료기기 수출 수입 앞질러


의료용도구·콘택트렌즈·치과기재 성장 두드러져

전후 다시금 의료기기 자급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으나 미군수품이 무상으로 공급되면서 또한번의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군수품 공급이 중단되면서 국산 의료기기를 개발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됐고, 경쟁력을갖춘 제품들이 속속 등장해 보급됐다.

기존에 개발돼 쓰이던 주사침, 주사기, 수술대, 콘돔, 수액세트 등의 품질이 크게 개선됐고, 다양한 수술기구, 콘텍트렌즈, 1회용주사기, 전자혈압계, 청진기, 보청기, 초음파 및 저주파 치료기, 각종 치과기자재, 엑스선 장치 및 치과용 엑스레이, 치과용 진료대, 전자체온계, 살균기 같은 의료기기들이 개발, 생산되기 시작했다.

남북의료기, 수술도구 생산으로 수출 길 열어
한국 의료기기 역사에 있어서 선구자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기업은 남북의료기였다.

남북의료기는 1970년 수원으로 이전한 뒤 생산업체를 남북이데아로 독립시켜 본격적인 생산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EDA사에서 수술기구인 인스트루먼트를 반제품 형태로 들여와 완제품을 만들어 국내 소비자들에게 공급했고, 추가 생산된 물량은 다시 독일 등에 수출했다.

남북의료기는 70년대 중반부터 생산품을 군납하기 시작했고 수술기구, 주사침, 주사바늘을 생산하는 국내 대표적인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고, 국내 의사들로부터 의료기기 백화점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반제품을 수입해 완제품 형태로 공급하는 회사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고, 경쟁에서 뒤쳐진 남북의료기는 80년대 후반 문을 닫게 된다.

이 자리를 대신한 것은 솔고산업사였다.

솔고는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해 국내 대표적인 의료기기 기업으로 자
리를 잡았다.

이외에도 중외제작소에서는 드렝싱 카, 병원용 집기, 병실 침대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세운산업은 고무제품을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품의 품질이 향상되면서 국내 병원에서도 가격이 비싼 수입용 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병원용 수술도기, 주사침 등이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도의 정밀기술 토대로 콘택트렌즈 생산 70년대 중후반에 들어 국가적으로 정밀
기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시작했고,이는 의료기기 분야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75년 공병오 박사가 콘택트렌즈 가공기술을 국내에 전수했고, 79년 무렵에 기술이 확산돼 관련 기업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콘택트렌즈 생산기업은 김응수 씨가 설립한 한국콘택트다.

이후 베스콘연구소에서 기술을 배운 이무걸 씨가 86년 국제콘택트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생산이 진행됐다.

초기의 콘택트렌즈는 비행기 유리를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들었다.

청계천에서 재료를 구해 1명의 숙련공이 15개 정도를 생산했다.

12명이 근무하던 한국콘텍트에서는 하루 120~150개가 생산돼 공급됐다.

당시 콘택트렌즈는 대량생산체제가 아닌 소령주문생산방식이었기 때문에 병원이나 대규모 안경점에서 소량 주문을 내리면 생산하는 체제를 갖고 있었다.

콘텍트렌즈는 제조공정이 무려 37단계나 되고 각각의 공정에 1,025가지나 되는 가공법이 존재할 만큼 고도의 기술과 정밀성을 요구하는 제품이다.


치과용 고급 의료기기 생산 본격화

치과기재에서 대표적인 기업인 신흥은 1969년 경기 고양에 매입해 둔 토지에 공장을 준공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1970년대부터 아사히 X-ray를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일본 모리타의 유닛체어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일본의 쇼후사와 기술제휴로 인공치아의 일종인 레진치를 생산하기 시작하는 등 점차 생산품목을 다양화하고 일부 부품을 개발하면서 제작기술을 습득했다.

1973년 11월에는 신흥치과산업과 일본의 모리타, 쇼후사와 기술제휴로 인공치아의 일종인 레진치를 생산하기 시작하는 등 점차 생산품목을 다양화하고 새로운 품목을 개발하면서 제작기술을 업그레이드했다.

이후 73년 11월에는 신흥치과산업과 일본 모리타, 쇼후가 합작으로 치과용 의료기기 및 기구 제조를 위한 코리아덴탈을 설립하고 유닛체어, 치과기재를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1978년에 생산되기 시작한 유닛 체어 ‘머메이드’는 외국 선진 제품들과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다.

이후 중소 규모의 후발업체들이 등장해 치과산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 청계천에서 기계수리업을 하던 오성산업사는 1975년 치과용 핸드피스, 교합기 등을 제작했고, 1976년에는 정식 공장을 설립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성산업사는 이후에도 끊임없는 연구개발, 자동화 설비 구축으로 해외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석고 금속판 등 치과재료를 취급하던 동서의료기도 공장을 설립해 생산을 시작했고, 금은방에서 금, 백금 등 치과재료를 취급하던 삼신의료상사도 69년부터 치과주조용 합금 제조기술개발에 뛰어들어 치과재료 국산화에 기여했다.

삼신의료상사는1970년 Casting Gold Alloy, 1980년 PorcelainGold Allory, 2000년에 Non-Preciosn Metal을개발해 판매했다.

의료기기 산업에 찾아온 전성기80년대는 의료기기 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1973년 처음으로 208만 달러를 기록한 이후 1980년에는 2,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수입이 1,200만 달러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수입을 앞 선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주요 수출 품목은 주사기, 콘돔, 수액세트, 수술용품 및 치과기자재 등이었으나 이후에 품목은 더욱 다양해졌다.

의료기기 수출의 중심에는 치과기재 전문기업인 신흥이 있었다.

1970년에 연간100만 개의 레진치를 수출한 뒤 1973년에는 12만3,000달러를 벌어들였다.

신흥은 1976년 필리핀에 대리점을 두고 아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100만 달러를
초과 달성하기도 했다.

동아엑스선기계에서도 1976년 6월 파키스탄에 2대의 엑스선장치를 수출을 계기로 80년대에는 필리핀, 멕시코 등에 엑스선 장치를 대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산 의료기기가 수출된 국가는 과테말라, 그리스, 남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네팔, 노르웨이, 뉴질랜드, 네덜란드, 대만, 덴마크, 레바논, 말레이시아, 멕시코, 모로코, 미국, 방글라데시, 서독, 수단,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등 51개 국에 달했다.

당시 미국, 독일, 일본에 수출이 100만 달러를 넘었고 스웨덴, 싱가포르, 아르헨티나 등에도 10만 달러가 넘는 수출을 진행했다.

그러나 의료기기 산업에 있어서 무역수지 흑자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첨단 의료기기 개발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호에는 수입사들이 다시금 국내 시장을 장악하게 되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을 살펴보고자 한다.

8/06/2019

[조합 40주년] 수입에 의존하던 의료기기 하나둘 국산화 성공

해방, 그리고 6·25전쟁 이후 피폐한 산업 시설 극복
의료기기 제조기업 새로운 희망 발견



우리나라 의료기기 제조기업의 역사는 그리 순탄지 않았다. 

해방 이후 의료기기 제조 산업이 본격화되는 듯 했으나 미군에서 쏟아져 나온 군수품으로 판매량이 줄고, 곧 이은 6·25전쟁으로 생산시설 대부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의료기기 생산업자들이 어렵게 일궈 놓은 의료기기 제조산업의 기반이 초기화된 때였다. 

이런 의료기기 불모지에서도 의료기기 제조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하나둘 국산화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이후의 의료 공백기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난 시기에 우리나라의 의료기관은 의약품, 의료기기 전반적인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의료기기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이를 구할 수 없어서 치료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진료 조차도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 몇몇이 의료기기 제조에 뛰어들었고, 유리주사기, 핀셋, 수술대 등을 자급할 수 있게 됐다.

첨단기술보다는 기존에 기술을 활용해 의료기기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의료기기를 생산해 병원에 보급했다. 

당시 의료기관들은 국산 제품의 품질이 크게 떨어졌지만 부족한 물자로 인해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나마 몇몇 자생적으로 발생하던 의료기기 제조 산업은 암흑기에 빠지게 된다. 

전쟁기간 동안에는 전쟁으로 인한 외상환자를 돌보기 위해 외과의와 관련 의료기기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생산시설을 마련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미군이 참전하면서 미군에서 나온 군수 물자가 병원에 공급되기 시작했고 군수물자가 무료로 보급되면서 몇몇 남아 있던 의료기기 제조기업들은 판로확보가 여의치 않아 대부분 도산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도 군수물품을 구해 직접 분해 조립하면서 의료기기에 제작에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국산 의료기기 생산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국산 의료기기의 수요가 가장 먼저 늘기 시작한 곳은 산부인과였다. 

산부인과에서 필요한 의료기기도 미군의 군수물자가 제공됐지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유는 서양인의 체격과 동양인의 체격이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사들이 몇몇 의료기기 제조상들과 함께 제품 개발을 시작했고 이런 제품들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한국 의료기기 제조기업의 등장
국내 의료기기 제조기업들이 하나둘 의료기기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시장은 생각만큼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의사들 대부분이 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손에 익은 의료기기를선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외국 제품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국내 의료기기 산업은 더디게 발전해 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병의원이 전국적으로 설립되고 의사수도 크게 늘어나는 등 의료환경의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새로운 기회를 맡게 됐다. 

지속적인 수요증가에 힘입어 의료기기 생산을 시도하고 일부 성공한 판매업자들이 직접 생산에 뛰어들면서 활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서구식 병원 설립 역사가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의사들이 꾸준히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료기기 제조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바로 ‘남북의료기’와 ‘세운메디칼’이다. 

이들 기업들은 판매로 축적한 자본을 생산에 투자해 일반의료기의 성장역사를 썼다.

남북의료기는 연건동에 제법 큰 규모의 공장을 가지고 탈장방지대 등 고무원료로 제품을 주로 만들었다. 

또 대규모로 주사침을 만들어 공급했고, 수술기구를 OEM방식으로 생산해 30%를 내수로 사용하고 70%를 수출했다.

‘세운메디칼’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유리 주사기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품목을 변경해 수술용 고무장갑, 도뇨관 등 라텍스 제품을 주로 생산하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이들 기업들은 수차례 사업을 시작하고 문을 닫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 시설, 기술이 모두 부족했고 인력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8/05/2019

[조합40주년] 의학 교육을 통해 다양한 의료기기 전파돼

청진기·현미경·카이모그래프·외과용 수술도구 등





첨단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의료기기 제조산업.

우리나라에서 의료기기 제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현대의학의 전래와 맥을 같이 한다.

외과 수술 등 현대의학이 전해지면서 서양 의료기기들이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를 모방한 국산 장비들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

이번에는 해방 이후의 혼란스런시기의 의료기기 제조산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924년 경성제대 예과가 개설되면서 우리나라 한국 학생들이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첫해에는 총 168명 중 한국인은 44명에 불과했지만 이후로 그 수가 꾸준히 늘어 1939년에는 74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고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의학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의학교육과 함께 다양한 서양 의료기기들에 대한 경험도 생기게 됐다.

의대생들이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청진기였다.

청진기는 몸속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서 질병을 진단하는 기기로 한의학에서 쓰이는 맥진을 현대적으로 더욱 용이하게 한 의료기기였다.

이와 함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접했던 의료기기는 현미경이었다.

1930년대 현미경은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확인하거나, 해부학을 통해 병변을 확인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당시 병원에서는 자이스(ZEISS) 현미경, 라이츠(LEITZ) 현미경 등이 가장 많이 사용됐다.

이외 한국인들에게 접근이 허용된 병리학, 해부학 등 필요한 연구용 의료기기들도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의료기기로는 카이모그래프(Kymograph), 원심분리기(centrifuge), 조직절편기(microtome)등이 있다.

카이모그래프는 심근 수축 등 생리현상을 계측하는 기기로 생리학 또는 병리학 수업에 많이 쓰였다.

원통형의 드럼 위에 숯 검댕을 묻히거나, 흰색 종이를 감은 뒤 먹선을 그리게 하는 식으로 기록하는 장치였다.

이외 원심분리기는 원심력을 이용해 혼합물의 성분을 분리하는 장비였고, 조직 절편기는 병리학적, 해부학적 연구를 위한 현미경으로 조직을 관찰할 수 있도록 얇게 자르는데 쓰인 제품이었다.

진단용 기기에는 액대경, 시력검정용 액자, 안과 진단기 등이 있었다.

액대경은 이비인후과 의사가 머리에 두르고 있는 반사경으로 빛을 반사시켜 어두운 곳을 볼 수 있도록 한 제품이다.

시력검정용 액자는 최근 안경점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시력 측정용 그림이다. 또 안과 진단용 기기는 당시 안과 질환을 살펴볼 수 있도록 고안된 제품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신체적 이상을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체온계 등이 널리 보급돼 있었다.

치료용 기기로는 외과용 수술 도구, 치과용 치료도구, 재활치료기구 등이 사용됐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메스라고 불리는 스칼펠, 시저(가위), 니들홀더, 포셉, 리트렉터 등 수술용 도구들이 사용됐고, 단두대식 편도 절제기도 널리 사용됐다.

산부인과, 정형외과, 치과에서도 치료에 필요한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수입돼 사용되기 시작했다. 근대병원은 치료의 장소만이 아니라 서양 근대 과학을 몸으로 배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직후 우리나라는 의학계에 있어서도 해방과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의료기관인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의료기관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제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의료단체들도 속속 새로 창립되기 시작했다. 해방직후 의사 들은 건국의사회를 조직했고 1947년 조선의학협회(현재 대한의사협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조선치과의학회가, 이듬해 대한간호협회로 설립되는 등 의료단체들이 새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료기기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일제시대 산업 생산물 소비시장으로 전락해 변변한 생산시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약품과 의료기기는 대부분 일본과 미국, 유럽 등으로부터 보급됐고, 국내 의료기기 산업은 유통 중심으로 발전했다. 일부 의료기기 산업이 존재했지만 대부분 가내수공업을 제외하고는 전무했다.

해방기를 맞이하여 미군과 원주물자로 들어오는 의약과 의료기기들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대세를 이루게 됐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유통을 한 기업으로 평양에 ‘평남의료기상사’, ‘신의의료기상사’가 있었고, 서울에는 ‘오쿠마의료기’, ‘이와사와의료기’가 각각 ‘한성의료기’, ‘십자당의료기’로 이름을 바꿔 운영하고 있었다.

해방 초기 의약품 및 의료기기에 대한 공급에 문제가 생기자 미군 중심의 위생보건사업이 시행됐고, 이 과정에서 태평양 전쟁에서 쓰고 남은 잉여 의약품과 위생용품, 의료기기 등 서방세계의 원조물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그러나 원조물자의 대량유입은 당시 위생보건에 긍정적인 역할을 가져왔으나 한편으로는 일제시대부터 시작한 유리주사기, 핀셋, 수술대 등 소규모 생산은 크게 위축됐다.

이런 가운데도 국내 의료산업을 일으키고자 하는 시도는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