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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2019

[조합40주년] 80년대 국산 의료기기 수출 수입 앞질러


의료용도구·콘택트렌즈·치과기재 성장 두드러져

전후 다시금 의료기기 자급을 위한 움직임이 일었으나 미군수품이 무상으로 공급되면서 또한번의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군수품 공급이 중단되면서 국산 의료기기를 개발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됐고, 경쟁력을갖춘 제품들이 속속 등장해 보급됐다.

기존에 개발돼 쓰이던 주사침, 주사기, 수술대, 콘돔, 수액세트 등의 품질이 크게 개선됐고, 다양한 수술기구, 콘텍트렌즈, 1회용주사기, 전자혈압계, 청진기, 보청기, 초음파 및 저주파 치료기, 각종 치과기자재, 엑스선 장치 및 치과용 엑스레이, 치과용 진료대, 전자체온계, 살균기 같은 의료기기들이 개발, 생산되기 시작했다.

남북의료기, 수술도구 생산으로 수출 길 열어
한국 의료기기 역사에 있어서 선구자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기업은 남북의료기였다.

남북의료기는 1970년 수원으로 이전한 뒤 생산업체를 남북이데아로 독립시켜 본격적인 생산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EDA사에서 수술기구인 인스트루먼트를 반제품 형태로 들여와 완제품을 만들어 국내 소비자들에게 공급했고, 추가 생산된 물량은 다시 독일 등에 수출했다.

남북의료기는 70년대 중반부터 생산품을 군납하기 시작했고 수술기구, 주사침, 주사바늘을 생산하는 국내 대표적인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고, 국내 의사들로부터 의료기기 백화점이라는 칭호를 얻으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반제품을 수입해 완제품 형태로 공급하는 회사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고, 경쟁에서 뒤쳐진 남북의료기는 80년대 후반 문을 닫게 된다.

이 자리를 대신한 것은 솔고산업사였다.

솔고는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해 국내 대표적인 의료기기 기업으로 자
리를 잡았다.

이외에도 중외제작소에서는 드렝싱 카, 병원용 집기, 병실 침대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세운산업은 고무제품을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품의 품질이 향상되면서 국내 병원에서도 가격이 비싼 수입용 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병원용 수술도기, 주사침 등이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도의 정밀기술 토대로 콘택트렌즈 생산 70년대 중후반에 들어 국가적으로 정밀
기술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시작했고,이는 의료기기 분야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75년 공병오 박사가 콘택트렌즈 가공기술을 국내에 전수했고, 79년 무렵에 기술이 확산돼 관련 기업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콘택트렌즈 생산기업은 김응수 씨가 설립한 한국콘택트다.

이후 베스콘연구소에서 기술을 배운 이무걸 씨가 86년 국제콘택트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생산이 진행됐다.

초기의 콘택트렌즈는 비행기 유리를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들었다.

청계천에서 재료를 구해 1명의 숙련공이 15개 정도를 생산했다.

12명이 근무하던 한국콘텍트에서는 하루 120~150개가 생산돼 공급됐다.

당시 콘택트렌즈는 대량생산체제가 아닌 소령주문생산방식이었기 때문에 병원이나 대규모 안경점에서 소량 주문을 내리면 생산하는 체제를 갖고 있었다.

콘텍트렌즈는 제조공정이 무려 37단계나 되고 각각의 공정에 1,025가지나 되는 가공법이 존재할 만큼 고도의 기술과 정밀성을 요구하는 제품이다.


치과용 고급 의료기기 생산 본격화

치과기재에서 대표적인 기업인 신흥은 1969년 경기 고양에 매입해 둔 토지에 공장을 준공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1970년대부터 아사히 X-ray를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일본 모리타의 유닛체어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일본의 쇼후사와 기술제휴로 인공치아의 일종인 레진치를 생산하기 시작하는 등 점차 생산품목을 다양화하고 일부 부품을 개발하면서 제작기술을 습득했다.

1973년 11월에는 신흥치과산업과 일본의 모리타, 쇼후사와 기술제휴로 인공치아의 일종인 레진치를 생산하기 시작하는 등 점차 생산품목을 다양화하고 새로운 품목을 개발하면서 제작기술을 업그레이드했다.

이후 73년 11월에는 신흥치과산업과 일본 모리타, 쇼후가 합작으로 치과용 의료기기 및 기구 제조를 위한 코리아덴탈을 설립하고 유닛체어, 치과기재를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1978년에 생산되기 시작한 유닛 체어 ‘머메이드’는 외국 선진 제품들과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다.

이후 중소 규모의 후발업체들이 등장해 치과산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 청계천에서 기계수리업을 하던 오성산업사는 1975년 치과용 핸드피스, 교합기 등을 제작했고, 1976년에는 정식 공장을 설립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성산업사는 이후에도 끊임없는 연구개발, 자동화 설비 구축으로 해외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석고 금속판 등 치과재료를 취급하던 동서의료기도 공장을 설립해 생산을 시작했고, 금은방에서 금, 백금 등 치과재료를 취급하던 삼신의료상사도 69년부터 치과주조용 합금 제조기술개발에 뛰어들어 치과재료 국산화에 기여했다.

삼신의료상사는1970년 Casting Gold Alloy, 1980년 PorcelainGold Allory, 2000년에 Non-Preciosn Metal을개발해 판매했다.

의료기기 산업에 찾아온 전성기80년대는 의료기기 수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1973년 처음으로 208만 달러를 기록한 이후 1980년에는 2,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수입이 1,200만 달러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수입을 앞 선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주요 수출 품목은 주사기, 콘돔, 수액세트, 수술용품 및 치과기자재 등이었으나 이후에 품목은 더욱 다양해졌다.

의료기기 수출의 중심에는 치과기재 전문기업인 신흥이 있었다.

1970년에 연간100만 개의 레진치를 수출한 뒤 1973년에는 12만3,000달러를 벌어들였다.

신흥은 1976년 필리핀에 대리점을 두고 아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100만 달러를
초과 달성하기도 했다.

동아엑스선기계에서도 1976년 6월 파키스탄에 2대의 엑스선장치를 수출을 계기로 80년대에는 필리핀, 멕시코 등에 엑스선 장치를 대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산 의료기기가 수출된 국가는 과테말라, 그리스, 남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네팔, 노르웨이, 뉴질랜드, 네덜란드, 대만, 덴마크, 레바논, 말레이시아, 멕시코, 모로코, 미국, 방글라데시, 서독, 수단,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스리랑카, 시리아, 싱가포르 등 51개 국에 달했다.

당시 미국, 독일, 일본에 수출이 100만 달러를 넘었고 스웨덴, 싱가포르, 아르헨티나 등에도 10만 달러가 넘는 수출을 진행했다.

그러나 의료기기 산업에 있어서 무역수지 흑자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첨단 의료기기 개발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호에는 수입사들이 다시금 국내 시장을 장악하게 되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을 살펴보고자 한다.

7/31/2019

[조합40주년-인터뷰] 한국백신 하창화 회장, "의료기기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

(주)한국백신 하창화 회장

의료기기 제조업, 시간이 지날수록 인류 건강이라는 숭고한 의미 깨달게 해
조합 설립 목적은 국내 의료기기 산업 부흥…국내 의료기기 제조기업 발전 위해선 '의료기기조합' 중심으로 뭉쳐야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발전상을 모색하고자 한다.

의료기기조합의 창립 멤버이면서 국내 의료계 존경받는 선배인 하창화 회장을 찾았다.


우연히 시작한 의료기기사업

“누구도 내가 의료기기 사업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투자했던 의료기기 기업 대표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어쩔 수 없게 맡게 된거야.”

㈜한국백신 하창화 회장은 195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 생활을 하면서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하 회장은 당시 의료기기 기업을 하는 사장도 여럿 알고 지냈다. 그 중 친하게 지내던 주사기를 만드는 기업 대표도 친분이 있어 조금씩 투자를 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해당 업체 사장이 세상을 떠나면 서 회사가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당시 남북의료기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될 것 같자 투자자인 하 회장에게 와서 빚을 독촉했다.

하 회장은 관련 회사를 직접 맡아서 운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처분할지 결정해야 했다.

“당시 회사 벽 그늘 아래에는 외상값을 받으러온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 있었고, 조그만 창으로는 직원들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껌벅이면서 보고 있었지.”

당시만 대부분의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월급날이 되면 외상값을 받으러 온 아주머니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 회장은 회사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직원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회사를 인수하기로 한다.

“그때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날로 남북의료기에 가서 기업이 갖고 있던 부채를 다 갚았지.”

사람을 좋아하던 그가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의료기기 분야에 뛰어든 것이다.

협력과 신뢰를 최우선으로 일단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그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주사기’는 제조사가 아닌 판매상들에 의해 유통됐기 때문이다.

판매상들의 마음을 얻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병원에 납품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하 회장은 판매상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거래 신뢰 생기자 거래처 크게 늘어

“판매상의 어려운 점을 우리가 해소해 주기로 했어. 우선 어음을 낮은 이율로 빠르게 유통할 수 있도록 회사가 보증하기로 한 거야.”

당시에는 대급 지금 수단으로 어음이 통용됐다.

판매업체들이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병원이나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을 현금화해야 하는데, 할인도 문제였지만 확인하고 바꾸는 시간도 1시간에서 2시간이 소요되기 일쑤였다.

㈜한국백신은 어음할인 업체에 대해 일정 금액 최저 할인율로 바로 현금화할 수 있도록 보증했다.

만약에 어음에 문제가 있으면 회사가 그 금액을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백신에 어음 보증 도장을 받기 위해서 판매상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한국백신은 어음 보증 도장을 찍어주는 직원이 상주했을 정도다.

물론 이렇게 신세지게 된 판매업체들은 자연스럽게 한국백신 주사기를 취급하기 시작했고 판매량도 꾸준히 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신뢰야. 그건 하루이틀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중요하지”

한국백신이 사업을 확장해 백신 사업을 하게 됐을 때 일이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고, 많은 백신 업체들이 이를 손놓고 보고만 있었다.

당시 수입사들 상당수가 천재지변이라서 보상을 못한다고 했을 때 한국백신은 특수차 17대를 동원해 정전 등으로 인해 백신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병원을 도왔고, 특수차를 통해서도 보호하지 못한 30%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백신 교환 등을 통해 책임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병원에서 신뢰하기 시작했고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국산 의료기기 구심점 필요 

“당시 한국의료기기공업협회가 있었지만 업계 대표들간의 친목 단체였어. 시간이 지나면서 의료기기 제조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의료기기조합이라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

하 회장은 당시 의료기기 제조산업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목적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흥 이영규 회장, 아이리 이상호 회장도 뜻을 같이 해 1979년 10월 당시 보건 사회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의료용구공업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영규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기틀을 다졌고, 녹십자 고영환 이사장, 아이리 이상호 이사장을 거치면서 국내 의료기기 대표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조합은 의료기기공업협회를 통합해 명실공히 의료기기 대표단체가 된 거야. 당시에도 수입업체들이 단체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지."

하 회장은 의료기기조합 창립 멤버로 9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한 때 주사기 포장에서 나오는 가루 같은 이물질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해당 제품은 당시 몇 원도 아닌 몇 전 이 쌌기 때문에 업체들은 대부분 그 가루를 사용했다.

당시 해당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한국백신뿐이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해. 조금 이윤을 더 남기겠다고 그런 짓을 하면 안돼. 제대로 만들어야 하고 좋은 물건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해”

사실 주사기 분야는 수익이 거의 남지 않는다.

하 회장은 수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품질을 낮추기보다는 공정을 개선하는 방식을 택했다.

현재 한국백신 주사기 공장은 전 공정이 로봇을 통해 진행되고 있고, 사람이 관리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 회장은 후배 의료기기 기업들에게 좋은 거래선을 만들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하 회장은 경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지만 아직도 거래선을 바꿀 때는 별도 보고를 받고 있다.

또 벡톤디킨슨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에 공장을 설립할 때도 국내 주사기 산업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백신의 공장시설은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좋은 거래선을 가지고 있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일류가 된다고 믿는다”

하 회장은 국내 의료기기 기업들을 격려하는 말이기도 했다.

김정상 기자 sang@medine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