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료기기의 원류는 한의학 ‘침’, ‘부항기’
오랜 역사 속에서 의료기기 정밀 기술 습득…이후 양방 의료기기 개발 바탕
첨단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의료기기 제조 산업.
우리나라 의료기기 제조 산업의 시초는 현대 의학이 전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수백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침'이라는 의료기기가 존재했다.
침을 제조할 수 있을 정도의 정밀하고 섬세한 기술은 이후 현대의학으로 중심 의학이 변화할때도 바탕이 돼 의료기기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의료기기는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적 도구로 의학의 발전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하게 변화돼 왔다.
과거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던 의학은 한의학이었다. 한의학이 일반의학이었을 당시에는 한방침, 뜸기, 부황기 등의 의료기기가 개발돼 사용됐다.
고문헌에 따르면 한의학은 고조선 이전부터 시작됐고 이후 중국에서 전해진 동양의학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에 들어서 점차 체계화됐다.
중국의 동양의학은 중국, 인도, 아라비아의 의학을 포함한 것으로 한나라때 들어 최초의 의서인 ‘황제내경’이 집대성된다. 이후 ‘신농본초경’, ‘상한론’ 등이 출간됐고, ‘본초강목’, ‘쌍서’ 등이 출간되면서 동양의학의 모습이 갖추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조선후기 허준이 ‘동의보감’은 이런 의서들을 우리나라에 실정에 맞게 정리
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한의학은 인체를 소우주로 보고 오장육부를 음양으로 나누어 음양의 부조화로 생긴 질병을 치료하는데 그 수단으로 약물요법과 침구요법을 사용한다.
여기에는 기공요법, 부항요법, 지압요법, 한방체조요법 등 물리요법이 병행됐는데 효과적으
로 치료를 진행할 수 있도록 관련 의료기기들이 발달했다.
과거 한의학은 치료방법이 서양의학과 달라 침구와 부항기 등 제한적인 기기만이 발달했지만 최근에는 첨단 과학이 결합되면서 설진기, 맥진기, 레이저 침 등 새로운 의료기기 개발되고 있다.
한의학의 침구요법은 경혈을 자극해 피부 표면으로부터 생체기능의 변조를 조정하여 건강을 증진시키고 질환을 치료하는의술이다.
참고로 침에 대한 효과는 면역 기능 강화 및 통증 완화 등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이미 현대과학으로도 입증됐다.
한의학은 혈을 효과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규격을 지닌 침을 이용한다.
침의 종류만도 참침, 원침, 저침, 봉침, 피침, 원리침, 호침, 장침, 대침 등 9가지가 있으며, 이 침들은 각각 피부용, 혈맥용, 근육용으로 구분하고, 혹, 악창, 통증, 관절치료 등 질병의 특성에 따라도 구분해 사용했다.
이외에도 침은 사혈, 배농, 절개 등 외과적인 수술에도 활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침의 종류는 호침, 삼릉침, 피내침, 전침, 수침, 피부침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침의 구조는 침끝, 침몸, 침뿌리, 침자루, 침꼬리의 다섯 부분으로 구분이 되며, 길이는 1치3푼(약3.94cm)과 1치6푼(약 4.85cm), 굵기는 번호로 구분해 1~10번의 침이 주로 쓰인다.
재료에 따라 금침, 은침, 마한철침, 합금침이 있고 최근에는 스테인레스침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침과 함께 한의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의료기기인 구(뜸)는 약재를 피부의 특정 부위 위에 올려놓고 태우거나 태운 김을 쏘여 질병을 치료하는 한방요법이다.
약재로는 쑥을 가장 많이 이용하나 뽕나무 가지나 복숭아나무, 개자, 한련초 등을 쓰기도 한다.
주로 경혈을 많이 이용하는 구점에 약쑥 잎을 가공한 뜸쑥을 연소시켜 생체에 온 열자극을 줘 생체반응을 일으켜 질병을 예방, 치료하는 물리요법이다.
초기에는 별도의 의료기기 없이 시슬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쑥봉을 넣어 태울 수 있는 뜸기가 개발됐다.
또 부항기는 부항요법에 사용되는 의료기기로 경혈부위의 피부에 음압을 작용시켜 인체 내의 독소인 어혈을 뽑아내 체질을 정화하는 요법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민간요법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과거에는 동물의 뿔을 이용했으나 최근에 는 유리, 플라스틱, 나무, 세라믹 등의 재료로 제작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의료기기 제조의 원류는 한의학에 기반하고 있으며 지금도 한의학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의료기기들이 개발되고 있다.
또 이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진행돼 가시적인 성과도 내놓고 있다.
실제로 국내 개발 설진기, 맥진기, 약탕기, 피내침, 이철, 전철기, 뜸 등 의료기기가 국제표준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맥진기는 환자의 맥진, 혈압, 혈액순환 상태 등 심혈관을 동시에 진단할 수 있는 IT융합기술로 전통의학분야 활용은 물론 세계 시장규모가 약 4조원으로 추정되는 혈압계 시장에 진출가능성도 기대되고 있다.
8/01/2019
7/31/2019
[조합40주년-인터뷰] 한국백신 하창화 회장, "의료기기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
(주)한국백신 하창화 회장
의료기기 제조업, 시간이 지날수록 인류 건강이라는 숭고한 의미 깨달게 해
조합 설립 목적은 국내 의료기기 산업 부흥…국내 의료기기 제조기업 발전 위해선 '의료기기조합' 중심으로 뭉쳐야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발전상을 모색하고자 한다.
의료기기조합의 창립 멤버이면서 국내 의료계 존경받는 선배인 하창화 회장을 찾았다.
우연히 시작한 의료기기사업
“누구도 내가 의료기기 사업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투자했던 의료기기 기업 대표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어쩔 수 없게 맡게 된거야.”
㈜한국백신 하창화 회장은 195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 생활을 하면서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하 회장은 당시 의료기기 기업을 하는 사장도 여럿 알고 지냈다. 그 중 친하게 지내던 주사기를 만드는 기업 대표도 친분이 있어 조금씩 투자를 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해당 업체 사장이 세상을 떠나면 서 회사가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당시 남북의료기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될 것 같자 투자자인 하 회장에게 와서 빚을 독촉했다.
하 회장은 관련 회사를 직접 맡아서 운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처분할지 결정해야 했다.
“당시 회사 벽 그늘 아래에는 외상값을 받으러온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 있었고, 조그만 창으로는 직원들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껌벅이면서 보고 있었지.”
당시만 대부분의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월급날이 되면 외상값을 받으러 온 아주머니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 회장은 회사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직원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회사를 인수하기로 한다.
“그때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날로 남북의료기에 가서 기업이 갖고 있던 부채를 다 갚았지.”
사람을 좋아하던 그가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의료기기 분야에 뛰어든 것이다.
협력과 신뢰를 최우선으로 일단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그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주사기’는 제조사가 아닌 판매상들에 의해 유통됐기 때문이다.
판매상들의 마음을 얻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병원에 납품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하 회장은 판매상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거래 신뢰 생기자 거래처 크게 늘어
“판매상의 어려운 점을 우리가 해소해 주기로 했어. 우선 어음을 낮은 이율로 빠르게 유통할 수 있도록 회사가 보증하기로 한 거야.”
당시에는 대급 지금 수단으로 어음이 통용됐다.
판매업체들이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병원이나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을 현금화해야 하는데, 할인도 문제였지만 확인하고 바꾸는 시간도 1시간에서 2시간이 소요되기 일쑤였다.
㈜한국백신은 어음할인 업체에 대해 일정 금액 최저 할인율로 바로 현금화할 수 있도록 보증했다.
만약에 어음에 문제가 있으면 회사가 그 금액을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백신에 어음 보증 도장을 받기 위해서 판매상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한국백신은 어음 보증 도장을 찍어주는 직원이 상주했을 정도다.
물론 이렇게 신세지게 된 판매업체들은 자연스럽게 한국백신 주사기를 취급하기 시작했고 판매량도 꾸준히 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신뢰야. 그건 하루이틀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중요하지”
한국백신이 사업을 확장해 백신 사업을 하게 됐을 때 일이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고, 많은 백신 업체들이 이를 손놓고 보고만 있었다.
당시 수입사들 상당수가 천재지변이라서 보상을 못한다고 했을 때 한국백신은 특수차 17대를 동원해 정전 등으로 인해 백신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병원을 도왔고, 특수차를 통해서도 보호하지 못한 30%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백신 교환 등을 통해 책임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병원에서 신뢰하기 시작했고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국산 의료기기 구심점 필요
“당시 한국의료기기공업협회가 있었지만 업계 대표들간의 친목 단체였어. 시간이 지나면서 의료기기 제조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의료기기조합이라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
하 회장은 당시 의료기기 제조산업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목적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흥 이영규 회장, 아이리 이상호 회장도 뜻을 같이 해 1979년 10월 당시 보건 사회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의료용구공업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영규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기틀을 다졌고, 녹십자 고영환 이사장, 아이리 이상호 이사장을 거치면서 국내 의료기기 대표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조합은 의료기기공업협회를 통합해 명실공히 의료기기 대표단체가 된 거야. 당시에도 수입업체들이 단체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지."
하 회장은 의료기기조합 창립 멤버로 9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한 때 주사기 포장에서 나오는 가루 같은 이물질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해당 제품은 당시 몇 원도 아닌 몇 전 이 쌌기 때문에 업체들은 대부분 그 가루를 사용했다.
당시 해당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한국백신뿐이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해. 조금 이윤을 더 남기겠다고 그런 짓을 하면 안돼. 제대로 만들어야 하고 좋은 물건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해”
사실 주사기 분야는 수익이 거의 남지 않는다.
하 회장은 수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품질을 낮추기보다는 공정을 개선하는 방식을 택했다.
현재 한국백신 주사기 공장은 전 공정이 로봇을 통해 진행되고 있고, 사람이 관리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 회장은 후배 의료기기 기업들에게 좋은 거래선을 만들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하 회장은 경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지만 아직도 거래선을 바꿀 때는 별도 보고를 받고 있다.
또 벡톤디킨슨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에 공장을 설립할 때도 국내 주사기 산업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백신의 공장시설은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좋은 거래선을 가지고 있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일류가 된다고 믿는다”
하 회장은 국내 의료기기 기업들을 격려하는 말이기도 했다.
김정상 기자 sang@medinet.or.kr
의료기기 제조업, 시간이 지날수록 인류 건강이라는 숭고한 의미 깨달게 해
조합 설립 목적은 국내 의료기기 산업 부흥…국내 의료기기 제조기업 발전 위해선 '의료기기조합' 중심으로 뭉쳐야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발전상을 모색하고자 한다.
의료기기조합의 창립 멤버이면서 국내 의료계 존경받는 선배인 하창화 회장을 찾았다.
우연히 시작한 의료기기사업
“누구도 내가 의료기기 사업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 투자했던 의료기기 기업 대표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서 어쩔 수 없게 맡게 된거야.”
㈜한국백신 하창화 회장은 195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 생활을 하면서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하 회장은 당시 의료기기 기업을 하는 사장도 여럿 알고 지냈다. 그 중 친하게 지내던 주사기를 만드는 기업 대표도 친분이 있어 조금씩 투자를 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해당 업체 사장이 세상을 떠나면 서 회사가 문을 닫을 상황에 처했다.
당시 남북의료기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될 것 같자 투자자인 하 회장에게 와서 빚을 독촉했다.
하 회장은 관련 회사를 직접 맡아서 운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처분할지 결정해야 했다.
“당시 회사 벽 그늘 아래에는 외상값을 받으러온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 있었고, 조그만 창으로는 직원들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껌벅이면서 보고 있었지.”
당시만 대부분의 물건을 외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월급날이 되면 외상값을 받으러 온 아주머니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 회장은 회사가 문을 닫을 지도 모른다는 직원들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회사를 인수하기로 한다.
“그때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날로 남북의료기에 가서 기업이 갖고 있던 부채를 다 갚았지.”
사람을 좋아하던 그가 사람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의료기기 분야에 뛰어든 것이다.
협력과 신뢰를 최우선으로 일단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그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주사기’는 제조사가 아닌 판매상들에 의해 유통됐기 때문이다.
판매상들의 마음을 얻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병원에 납품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하 회장은 판매상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거래 신뢰 생기자 거래처 크게 늘어
“판매상의 어려운 점을 우리가 해소해 주기로 했어. 우선 어음을 낮은 이율로 빠르게 유통할 수 있도록 회사가 보증하기로 한 거야.”
당시에는 대급 지금 수단으로 어음이 통용됐다.
판매업체들이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병원이나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을 현금화해야 하는데, 할인도 문제였지만 확인하고 바꾸는 시간도 1시간에서 2시간이 소요되기 일쑤였다.
㈜한국백신은 어음할인 업체에 대해 일정 금액 최저 할인율로 바로 현금화할 수 있도록 보증했다.
만약에 어음에 문제가 있으면 회사가 그 금액을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국백신에 어음 보증 도장을 받기 위해서 판매상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고, 한국백신은 어음 보증 도장을 찍어주는 직원이 상주했을 정도다.
물론 이렇게 신세지게 된 판매업체들은 자연스럽게 한국백신 주사기를 취급하기 시작했고 판매량도 꾸준히 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신뢰야. 그건 하루이틀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중요하지”
한국백신이 사업을 확장해 백신 사업을 하게 됐을 때 일이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고, 많은 백신 업체들이 이를 손놓고 보고만 있었다.
당시 수입사들 상당수가 천재지변이라서 보상을 못한다고 했을 때 한국백신은 특수차 17대를 동원해 정전 등으로 인해 백신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병원을 도왔고, 특수차를 통해서도 보호하지 못한 30%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백신 교환 등을 통해 책임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병원에서 신뢰하기 시작했고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국산 의료기기 구심점 필요
“당시 한국의료기기공업협회가 있었지만 업계 대표들간의 친목 단체였어. 시간이 지나면서 의료기기 제조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의료기기조합이라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지."
하 회장은 당시 의료기기 제조산업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목적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흥 이영규 회장, 아이리 이상호 회장도 뜻을 같이 해 1979년 10월 당시 보건 사회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의료용구공업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영규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기틀을 다졌고, 녹십자 고영환 이사장, 아이리 이상호 이사장을 거치면서 국내 의료기기 대표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조합은 의료기기공업협회를 통합해 명실공히 의료기기 대표단체가 된 거야. 당시에도 수입업체들이 단체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지."
하 회장은 의료기기조합 창립 멤버로 9대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한 때 주사기 포장에서 나오는 가루 같은 이물질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해당 제품은 당시 몇 원도 아닌 몇 전 이 쌌기 때문에 업체들은 대부분 그 가루를 사용했다.
당시 해당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한국백신뿐이었다.
“의료기기를 만드는 사람은 달라야 해. 조금 이윤을 더 남기겠다고 그런 짓을 하면 안돼. 제대로 만들어야 하고 좋은 물건이 공급될 수 있도록 해야 해”
사실 주사기 분야는 수익이 거의 남지 않는다.
하 회장은 수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품질을 낮추기보다는 공정을 개선하는 방식을 택했다.
현재 한국백신 주사기 공장은 전 공정이 로봇을 통해 진행되고 있고, 사람이 관리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 회장은 후배 의료기기 기업들에게 좋은 거래선을 만들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하 회장은 경영에서 한 발 물러나 있지만 아직도 거래선을 바꿀 때는 별도 보고를 받고 있다.
또 벡톤디킨슨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국내에 공장을 설립할 때도 국내 주사기 산업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백신의 공장시설은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좋은 거래선을 가지고 있고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일류가 된다고 믿는다”
하 회장은 국내 의료기기 기업들을 격려하는 말이기도 했다.
김정상 기자 sang@medinet.or.kr
7/23/2019
[조합40주년-초창기] 전후, 의료기기 수입 의존…미국 일본 제품 의존
조합 4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의료기기 역사를 되돌아 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 첫번째로 우리나라 전후의 시장 상황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끝나면서 전쟁의 과정에서 의료기기 수입에 관여했던 업체들을 중심으로 산업이 구성됐다.
50년대 후반부터 남북의료기기, 동양의료기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수익성이 보장된다는 점도 있었지만 부족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격적인 의료기기 수입을 진행했다.
당시 수입통계 자료를 보면 전쟁 말기 1953년 11만 2천 달러에 이르던 수입은 미군수품의 영향으로 대폭감소하다가, 1959년 33만 7천 달러, 1964년 93만 3천달러를 기록했다.
군수품 지원이 끊기면서 그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수입이 늘어난 부분도 있고, 수입원가가 높아지면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부분도 있다고 분석된다.
전후 1954년부터 7년 동안 국가 재건을 위해 다양한 해외 원조기금을 조성했는데, 이 당시 원조기금은 수입의존형 경제체제를 정착시키는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
우리는 대체로 1차 상품을 수출하고, 선진국으로부터는 생필품과 의료기기와 같은 제품을 수입했다.
이러한 경제여건 속에서 의료기기산업 역시 수출은 물론이고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많은 유통기업들이 미국, 일본 의료기기 수입시장에 뛰어들어 높은 수익을 내기도 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인의 방한이 정식으로 허용되면서 일본 의료기기의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연간 30여 대에 이르는 일본산 엑스선 장치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치과기자재를 비롯한 일반 의료기기 수입도 크게 늘어났다.
7/22/2019
국산 의료기기 발전 40주년 슬로건 모집
한국 의료기기 제조산업 발전을 위한 가슴 벅찬 슬로건을 공모한다.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이사장 이재화, 이하 의료기기조합)은 오는 7월 26일까지 ‘40주년 기념식 및 2030 비전 선포식’에 맞는 슬로건을 회원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공개 공모한다.
의료기기조합은 1979년 10월 18일 보건복지부의 인가를 받아 설립돼 국내 의료기기 제조산업 발전을 위해서 활동해 왔다.
40주년을 맞아 의료기기조합은 2019년 8월 28일 ‘조합 설립 기념식, 2030 비전 선포식을 개최한다.
조합 2030비전을 ‘국산 의료기기 국내점유율 70% 글로벌점유율 7% 글로벌시장 7위’로 정하고 핵심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조합은 회원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해당 비전을 공유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슬로건을 공개 모집한다.
이재화 이사장은 “40주년을 맞아 회원사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며 “이번 슬로건은 향후 한국 의료기기 제조산업 발전의 기치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회원사의 많은 참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조합은 기념식 슬로건을 응모한 회원사 임직원을 시상할 예정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조합 홈페이지 공지사항
(http://www.medinet.or.kr/?page_id=13390&mod=document&uid=527)을 참조하면 된다.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이사장 이재화, 이하 의료기기조합)은 오는 7월 26일까지 ‘40주년 기념식 및 2030 비전 선포식’에 맞는 슬로건을 회원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공개 공모한다.
의료기기조합은 1979년 10월 18일 보건복지부의 인가를 받아 설립돼 국내 의료기기 제조산업 발전을 위해서 활동해 왔다.
40주년을 맞아 의료기기조합은 2019년 8월 28일 ‘조합 설립 기념식, 2030 비전 선포식을 개최한다.
조합 2030비전을 ‘국산 의료기기 국내점유율 70% 글로벌점유율 7% 글로벌시장 7위’로 정하고 핵심역량을 집중하기로 했다.
조합은 회원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해당 비전을 공유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슬로건을 공개 모집한다.
이재화 이사장은 “40주년을 맞아 회원사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며 “이번 슬로건은 향후 한국 의료기기 제조산업 발전의 기치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회원사의 많은 참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조합은 기념식 슬로건을 응모한 회원사 임직원을 시상할 예정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조합 홈페이지 공지사항
(http://www.medinet.or.kr/?page_id=13390&mod=document&uid=527)을 참조하면 된다.
5/08/2019
대한의용생체공학회, 여수서 '40주년 춘계학술대회' 개최
대한의용생체공학회(회장 김희찬, 이하 학회)가 9일, 10일 양일간 여수 엠블 호텔에서 '2019년 대한의용생체공학회 춘계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춘계학술대회는 학회 창립 40주년을 맞아 진행되는 행사로 '의용생체공학 - 융합기술의 선도 40년(BME, the pioneer of convergence technology for 40 years)'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학회는 1979년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이 설립된 시기에 의학계와 공학계 관계자들에 의해서 창립돼 산업 발전을 이끌 인재 육성을 위해서 노력해 왔다.
현재 6,000여 학회 회원이 활동하고 있고, 국내에서 의용생체분야의 대표적인 학회다.
김희찬 회장(서울대병원)은 " 대한의용생체공학회는 융합학문을 대표 하는 학회로서 학문후속 세대를 양성하고 의료기기 산업을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을 견인할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번 학회를 통해 전통, 배움이 있는 학회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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