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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2019

[조합 40주년] 수입에 의존하던 의료기기 하나둘 국산화 성공

해방, 그리고 6·25전쟁 이후 피폐한 산업 시설 극복
의료기기 제조기업 새로운 희망 발견



우리나라 의료기기 제조기업의 역사는 그리 순탄지 않았다. 

해방 이후 의료기기 제조 산업이 본격화되는 듯 했으나 미군에서 쏟아져 나온 군수품으로 판매량이 줄고, 곧 이은 6·25전쟁으로 생산시설 대부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의료기기 생산업자들이 어렵게 일궈 놓은 의료기기 제조산업의 기반이 초기화된 때였다. 

이런 의료기기 불모지에서도 의료기기 제조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하나둘 국산화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이후의 의료 공백기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난 시기에 우리나라의 의료기관은 의약품, 의료기기 전반적인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의료기기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이를 구할 수 없어서 치료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진료 조차도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 몇몇이 의료기기 제조에 뛰어들었고, 유리주사기, 핀셋, 수술대 등을 자급할 수 있게 됐다.

첨단기술보다는 기존에 기술을 활용해 의료기기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의료기기를 생산해 병원에 보급했다. 

당시 의료기관들은 국산 제품의 품질이 크게 떨어졌지만 부족한 물자로 인해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나마 몇몇 자생적으로 발생하던 의료기기 제조 산업은 암흑기에 빠지게 된다. 

전쟁기간 동안에는 전쟁으로 인한 외상환자를 돌보기 위해 외과의와 관련 의료기기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생산시설을 마련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미군이 참전하면서 미군에서 나온 군수 물자가 병원에 공급되기 시작했고 군수물자가 무료로 보급되면서 몇몇 남아 있던 의료기기 제조기업들은 판로확보가 여의치 않아 대부분 도산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도 군수물품을 구해 직접 분해 조립하면서 의료기기에 제작에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국산 의료기기 생산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국산 의료기기의 수요가 가장 먼저 늘기 시작한 곳은 산부인과였다. 

산부인과에서 필요한 의료기기도 미군의 군수물자가 제공됐지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유는 서양인의 체격과 동양인의 체격이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사들이 몇몇 의료기기 제조상들과 함께 제품 개발을 시작했고 이런 제품들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한국 의료기기 제조기업의 등장
국내 의료기기 제조기업들이 하나둘 의료기기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시장은 생각만큼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의사들 대부분이 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손에 익은 의료기기를선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외국 제품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국내 의료기기 산업은 더디게 발전해 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병의원이 전국적으로 설립되고 의사수도 크게 늘어나는 등 의료환경의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새로운 기회를 맡게 됐다. 

지속적인 수요증가에 힘입어 의료기기 생산을 시도하고 일부 성공한 판매업자들이 직접 생산에 뛰어들면서 활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서구식 병원 설립 역사가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었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의사들이 꾸준히 배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료기기 제조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바로 ‘남북의료기’와 ‘세운메디칼’이다. 

이들 기업들은 판매로 축적한 자본을 생산에 투자해 일반의료기의 성장역사를 썼다.

남북의료기는 연건동에 제법 큰 규모의 공장을 가지고 탈장방지대 등 고무원료로 제품을 주로 만들었다. 

또 대규모로 주사침을 만들어 공급했고, 수술기구를 OEM방식으로 생산해 30%를 내수로 사용하고 70%를 수출했다.

‘세운메디칼’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유리 주사기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품목을 변경해 수술용 고무장갑, 도뇨관 등 라텍스 제품을 주로 생산하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이들 기업들은 수차례 사업을 시작하고 문을 닫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 시설, 기술이 모두 부족했고 인력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7/23/2019

[조합40주년-초창기] 전후, 의료기기 수입 의존…미국 일본 제품 의존

조합 4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의료기기 역사를 되돌아 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 첫번째로 우리나라 전후의 시장 상황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끝나면서 전쟁의 과정에서 의료기기 수입에 관여했던 업체들을 중심으로 산업이 구성됐다. 

50년대 후반부터 남북의료기기, 동양의료기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수익성이 보장된다는 점도 있었지만 부족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격적인 의료기기 수입을 진행했다.

당시 수입통계 자료를 보면 전쟁 말기 1953년 11만 2천 달러에 이르던 수입은 미군수품의 영향으로 대폭감소하다가, 1959년 33만 7천 달러, 1964년 93만 3천달러를 기록했다.

군수품 지원이 끊기면서 그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수입이 늘어난 부분도 있고, 수입원가가 높아지면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부분도 있다고 분석된다.
전후 1954년부터 7년 동안 국가 재건을 위해 다양한 해외 원조기금을 조성했는데, 이 당시 원조기금은 수입의존형 경제체제를 정착시키는 문제도 함께 가져왔다.

우리는 대체로 1차 상품을 수출하고, 선진국으로부터는 생필품과 의료기기와 같은 제품을 수입했다.

이러한 경제여건 속에서 의료기기산업 역시 수출은 물론이고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많은 유통기업들이 미국, 일본 의료기기 수입시장에 뛰어들어 높은 수익을 내기도 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인의 방한이 정식으로 허용되면서 일본 의료기기의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연간 30여 대에 이르는 일본산 엑스선 장치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치과기자재를 비롯한 일반 의료기기 수입도 크게 늘어났다.